채식주의만 있냐? 육식주의도 있다

육식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2
비건(Vegan)을 위한 육식주의 이해 

‘끔찍한 일이다! 동물의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가장 고귀한 영적 능력을 억누르고 감정을 거슬러 잔인해진다는 것이. 더구나 생명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가 말이다.’
- 레프 톨스토이, 中 

앞에서는 우리가 ‘채식주의’라는 테두리에 갇히기 보다, 고기를 먹는 문화와 행위에 ‘육식주의(Carnism)’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실체에 다가가야함을 다루었다. 이어 ‘육식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2’에서는 채식주의 운동에서 비채식인이 채식주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보다 채식주의자가 ‘육식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에디터. 비건편집실  +참고 자료CARNISM



육식주의의 유기적 구조
육식주의는 정치, 연예, 의료, 매체, 경제, 법, 교육 등 사회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 민족주의, 성차별주의, 계급주의 등 이 사회에 견고히 박혀 있는 다른 모든 이념처럼, 육식주의는 가족 단위에서 국가 단위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주요 조직 속에 매우 유기적으로 잘 짜인 구조를 이루며 제도화되어 있다.
육식주의의 유기적 구조는 동물성 제품의 생산과 소비를 일반화하고 합리화하는 방식을 통해 시스템 유지를 위한 신화 - 우유는 칼슘이 풍부한 완전식품이며, 인간은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등 - 들을 계속 만들어 낸다. 이러한 육식주의의 유기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동물을 먹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깊이 박힌 신념 체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라는 점을 똑바로 보게 해준다.
이러한 시각은 채식주의자와 관련 조직들이 동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꿔 놓으며 초점을 개인에 두지 않고 개인의 신념과 행동을 형성하는 사회 시스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로소 우리는 비채식인 한 명 한 명에 접근해 그들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단순히 한 사람의 섹시스트에 접근하여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들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직접적인 접근을 하는 동시에, 육식주의의 근간으로 널리 퍼져 있는 제도화된 추론과 관습을 언급하는 데에도 집중하여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채식주의자들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논쟁의 프레임을 새로이 형성하고 권력의 제도화된 시스템인 육식주의(Carnism) 맥락 속에 쟁점을 재배치해야 한다. 더불어, 채식주의자들이 바꾸려는 시스템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실체가 없는 존재에 대항하여 눈이 가려진 채로 싸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문화로 존재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의 태도와 행동, 제도와 규범, 언어, 정치 등을 이해하지 않고 성차별주의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조적인 수준에서 육식주의에 도전하기 위해서,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육식주의의 모습을 예상하고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시스템의 논리와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육식주의의 유기적 구조에 도전할 수 있을까? 
우선 단순히 채식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를 논하기보다 의료학계와 영양학계에 숨어있는 육식주의의 선입관을 지적해내는 방법이 있다. 육식주의 패러다임 안에서 일하고 있는 업계 종사자들과 연구자들의 객관성에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며, 식품의 생산과 안전을 관장하며 영양섭취 지침을 세우고, 영양학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KFDA) 같은 기관의 의사결정권자 구성이 과연 공정한가(채식주의자인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는지 등)에 대해 논쟁할 수 있다.
시민권 운동가들이 사회 제도에 뿌리 박힌 성차별주의적 선입관을 폭로하고 논쟁했던 것처럼 채식주의자들은 제도화된 육식주의 선입관을 폭로하고 식품과 영양에 관련한 공정한 대리를 탄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동물을 먹는 것이 이념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채식주의자들은 축산물 보조금에 대해 반박할 수 있다. 축산업을 위한 보조금이 없어진다면, 동물성 제품의 가격은 치솟을 것이다. 그러한 가격 상승은 소비자들의 수요를 극적으로 감소시킬 것이고, 더는 세금을 지원받지 못하는 육식주의 산업에 줄어든 소비자의 수요와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질 것이다. 

문제와 목표 재정립하기
전략 전문가들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중요한 단계는 우리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목표는 달라지고, 우리가 정의한 문제와 목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즉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 것인가를 정한다.  
채식주의자들은 현재, 문제를 동물성 제품의 생산과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의는 그 문제의 결과를 반영할 뿐이다. 진짜 문제는 육식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채식주의 운동의 목표는 단순히 동물성 제품의 생산과 소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육식주의, 그러한 생산과 소비를 애초에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변화가 되어야 한다. 
채식주의자들의 문제 인식이 그러하다 보니 해결 방법 또한 육식의 결과적인 면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알리는 것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설사 가축을 이용한 제품 생산 과정의 끔찍함이나, 고기, 달걀, 유제품의 섭취가 건강을 해친다는 것, 또는 축산업의 환경적인 해악 등에 공감한다고 해도 채식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방법을 적용하고 동물 먹기를 그만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육식주의가 문제의 본질이라면, 사람들에게 육식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알려야 한다. 
육류 소비자들은 동물을 먹는다는 것과 관련해 자신들이 지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평생 동안 어떤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지배되어왔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동물성 제품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진실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육식주의 뇌 구조
“세상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된다면, 그 많은 가축들은 다 어떻게 하느냐고? 하루아침에 인간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은 없어. 게다가 우리가 동물을 먹지 않는다면, 그 동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일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애초에 그 동물들을 키우지도 않았을 테니까!” 
“당신 손으로 직접 동물을 죽여야 한다면 정말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요?”
채식 생활을 하면서 이런 방어적인 태도로 서로의 입장을 정당화하기에만 바쁜 말싸움에 휘말린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육식과 채식 중 무엇이 더 정당한가에 대한 논쟁은 곧 상대를 몰아고 비난하는 형태로 이어져 무례를 범하기 마련인데, 이는 사람들이 고기와 달걀, 유제품에 대한 진실을 안다면 동물성 제품을 절대 먹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아래, 어떻게든 ‘사실’을 더 많이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빚어지는 오류이다. 생산적인 대화가 아닌 소모적인 감정전으로 번지기 쉬운 언쟁이 메시지 전달에 효과적일 리가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진실을 듣고 보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결국엔 옳고 그름,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 상대의 심리 속에는 개인적으로 내면화된 육식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심리 작용이 누구보다도 인정 많은 사람조차 진실을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채식주의자에 관한 부정적인 편견
‘반발(백래쉬, backlash)’은 지배적인 무리가 그 권력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방식이다. 육식주의 또한, 다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주로 애꿎은 메시지 전달자를 공격하는 방법으로 ‘반발’을 드러낸다. 육식주의 문화는 채식주의가 전하는 메시지를 해체하고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채식주의자들을 불신하게끔 하고 이들을 고기 먹는 ‘평범한’ 사람을 싫어하는 ‘안티’ 분자로 왜곡하거나, 급진적이고 히스테릭하며 전투적이어서 불편한 사람, 또는 비이성적이고 너무 감상적이어서 믿지 못할 사람으로 표현하곤 한다. 만약, 당신이 접근하려 하는 사람이 이런 태도로, 마치 두 사람이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굴며 당신을 불안정하고 비논리적인 사람으로 본다면 메시지 전달에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육식주의의 반동적 경향(백래쉬)을 이해한다면 그에 반발하기보다는 잘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채식주의자들에 대한 많은 부정적 태도들의 근원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기분 나빠하며, 똑같이 방어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향한 날을 세우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흔히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주의에 의해 2가지로 분류된다. 가죽을 걸칠 경우에는 ‘위선자’로, 그렇지 않을 경우엔 ‘극단주의자’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흥분하기보다는 이것이 육식주의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이해하여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전투적이고, 훈계하기 좋아하고, 늘 화나 있는, 특이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채식주의를 틀에 가두어 시스템을 유지하는 육식주의의 방식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아닌 ‘육식주의 Carnism’
다른 모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육식주의는 희생자를 만든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희생자는 동물들과 육식으로 망가지고 있는 지구 환경일 것이다. 희생은 이 정도만으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희생자는 훨씬 더 많다. 그들은 간접적인 피해자로, 그 속에는 가해자의 역할을 하는 도살장과 정육공장의 일꾼들, 그리고 비건(vegan)이 아닌 거의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채식주의자들은 종종 고기 먹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보기보다는 가해자로 생각하며 대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육식주의 방어기제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역할을 하며 채식주의자들은 잘난 체하고 강압적인 사람이라는 편견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상대를 적으로 단정하고 다가가서 설득할 경우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이미 경험해 본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를 개인이 아닌 육식주의 시스템 자체로 본다면, 이상적으로는 비채식인들과 ‘함께’ 문제 해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며, 최소한으로는 그들에게 효과적이면서도 정답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육식주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함으로써, 채식주의자들은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해 더 확신하게 될 것이며 신념은 더 명확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많은 경우, 채식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매우 건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가치와 타당성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그러한 라이프스타일을 왜 선택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문데 이러한 양면성은 좌절감과 오해를 불러오기에 십상이다. 생각해보라, 성차별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 왜 페미니스트인지를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
게다가 육식주의를 이해하게 되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밥상머리에서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라는 등의 부정적 이미지에 본인도 휘말리거나, 육식주의 문화가 가하는 압박에 굴복하는 - 예를 들면 의학 전문가가 고기의 섭취가 꼭 필요하다는 말에 타협을 해버리고 마는 - 일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채식주의 
육식주의가 지배적인 문화 속에서 비주류인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끔찍한 호러를 매일 목격해야 하며, 인간을 제외한 동물은 편파적으로 존엄성을 무시당하는 부당한 현실에 끊임없이 부딪혀야 한다. 이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점은 아마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주변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잔학 행위에 직접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끝내는 존중하기까지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더 기가 막힐 일은 모태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나 자신도 그들 중 하나이지 않았던가. 
채식주의자가 가장 많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사람들이 동물을 먹는 이유를 단순히 그들이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비정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추측은 스스로 냉소적인 독선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마련한다. 인류로부터 동떨어진 소외감, 심지어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한 고통마저 느끼기도 하며, 끝내는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 - 채식주의자가 아닌 - 과의 관계를 희생하기에 이르기도 하면서.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 육식주의(Carnism)를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에게 동물을 먹지 말라고 하는 일이 단순히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전환 - 오직 스스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환 - 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모든 진실과 타당성으로 상대를 설득하기 이전에,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이루어진 피할 수 없는 학습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테면, 불고기의 이미지와 냄새, 질감이나 맛이 사랑하는 할머니의 모습 또는 소중한 가족 모임 등의 따뜻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것부터 말이다. 이는, 우리가 좌절과 씁쓸함, 분노에 부딪혀 금방 지쳐버리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비채식인들에게 좀 더 정답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며, 지속해서 채식주의를 실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육식주의 문화가 어떤 큰 변화를 맞이하려면, 육식주의 시스템에 대한 자각이 그 주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 있는 채식주의 운동(Vegan Movement)마저 육식주의를 완전히 이해하고 파헤쳐내지 못한다면, 육식주의에 대한 자각은 절대 대중의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우리는 - 여태까지 거론된 이 모든 과학적인 근거들을 차치하더라도 -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명 유지는 다른 생명의 비참함으로부터 온다. 누군가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보여주겠다고 나서면 우리는 그것이 공포 영화나 다름없는 끔찍한 영상임을 쉽게 예상한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무리 기억의 어두운 저편으로 밀어내고 모른 척하려 해도 말이다. 공장식 축산 고기를 먹을 때 우리는 말 그대로 고문당한 살을 먹고 사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 고문의 살코기는 우리의 살이 된다.
- 조너선 사프란 포어(Jonathan Safran Foer),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Eating Animals)>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