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은 비윤리적인가? 그렇다



채식이 윤리적인 이유 ①
육식은 비윤리적인가?, 그렇다

현재 전세계 인구가 소비하는 육식의 1/3만 덜 먹어도(또는 덜 생산해도) 현존하는 기아문제와 환경파괴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육식을 줄일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건강에 좋지 않다 해도, 또 공산품처럼 생산되고 취급되는 동물이 불쌍하다 해도 이미 거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육식주의’ 시스템에 들어와버린 우리 입맛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자연 먹이사슬의 최상위 소비자이므로 동물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인류보다 우월한 생명체가 나타나면 그들에게 인류가 잡아먹히는 것도 당연한 걸까. 여기서 우리가 동물을 먹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짓)인가를 생각해보는 모티브로 삼아 이야기를 해보려한다.(편집자 주)

+글. 최훈(강원대 교수 )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 잡지 <비건>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건강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전 세계적으로는 종교적인 이유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힌두교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와 미국 농무부는 인도 인구의 20~40%를 채식주의자로 추정하는데, 인도의 인구가 12억이니 3억에서 5억 정도의 인구가 채식주의자가 된다. 인도 밖에 살고 있는 힌두교도들도 있으니 채식주의자인 힌두교도 인구는 더 늘어날 것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기독교 신자들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외에 식감 때문에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기 씹는 맛이 싫은 것이다. 거꾸로 어린이 중에서는 채소 씹는 맛이 싫어서 채소를 안 먹는 경우도 많다. 당근, 파, 시금치. 이런 것들만 골라낸다. 엄마는 기를 쓰고 먹이려고 하고 아이는 죽어라 안 먹으려고 하는 것이 채소다. 일본 만화 <짱구는 못 말려>의 주인공 짱구는 피망만 골라내다가 엄마한테 만날 혼난다. (일본 만화에는 피망을 싫어하는 캐릭터가 굉장히 많다.) 어떤 외국 만화의 주인공은 “브로콜리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애절하게 말한다.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어른인데도 브로콜리를 싫어한 것으로 유명했다. “나는 대통령이야. 그러니 브로콜리는 더 이상 안 먹어”라며 브로콜리를 안 먹기 위해서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유치하게 끌어들인 말을 하기도 했고, 그 말을 듣고 브로콜리 판매가 감소할 것을 걱정한 농부들이 트럭에 브로콜리를 실어 백악관에 보내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트라우마 때문에 고기를 안 먹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 동물을 잡아 죽이는 장면을 본 충격에 평생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이다. 구제역 사태 때, 동물들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고 “당분간은 고기를 못 먹을 것 같아요”라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당분간’이 평생을 가는 것이다.

‘채식주의’는 틀린 말이다?

여러 가지 동기의 채식주의를 길게 이야기한 까닭은 윤리적인 이유의 채식주의와 비교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비교해 보자. 우리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금연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건강을 위해서’나 ‘담배 냄새가 싫어서’와 같은 개인적인 동기인데, 거기에 무슨 ‘주의’를 붙이느냐는 생각인 것이다. ‘주의(主義)’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1번 뜻이 ‘굳게 지키는 주장이나 방침’이고, 2번 뜻이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2번 뜻의 ‘주의’가 ‘이즘(ism)’과 동의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떤 주장을 한다고 해서 ‘주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체계화된 이론을 갖추고 있을 때 ‘주의’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고기 씹는 맛이 싫어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담배 냄새가 싫어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금연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건강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종교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어떨까? 무슨 무슨 주의라고 부를 때는 단순히 자신이 지키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도 설득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민주주의자’라고 한다면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국가를 세우도록 애쓸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나 혼자서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나라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기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하려고 하는 것, 이것을 ‘일반화’ 또는 ‘보편화’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주의’라고 한다면, 혼자만의 단순한 주장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보편화가 가능해야 한다. 식감이나 트라우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그런 보편화의 의도 자체가 없다. 개인적인 습관이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건강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그렇게 실천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보편화할 수 있을까? “좀 건강하지 않으면 어때?”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보편화할 수가 없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의지력이 없어서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담배가 주는 장점(집중력 향상?)이 건강 같은 사안을 능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는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보편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오는데도 아직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건강 때문에 고기를 먹지 말라는 주장을 보편화할 수는 없다. 고기를 먹으면 건강에 나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도 어렵고, 건강에 좀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장점(입맛, 원기 충전감)이 있으므로 육식을 끊으라는 권유에 설득되지 않는다. 곧 건강 때문에 채식을 하는 것은 채식’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기호의 문제일 뿐이다. 식감이 동기가 되는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신의 뜻에 따른다?

종교적인 동기의 채식은 보편화 가능한 채식주의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종교나 모든 사람에게 포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편화를 시도하기는 한다. 그러나 종교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신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고,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편화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갖는다. 힌두교도는 모든 고기를 안 먹지만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처럼 특정 고기(돼지 고기)만 안 먹는 신자도 있다. 그들에게 왜 고기 또는 ‘그’ 고기를 안 먹느냐고 물어 보면 여러 교리를 설명하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이 믿는 신이 먹지 말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왜 신이 그렇게 시켰을까? 그거야 알 수 없지. 신의 거룩한 뜻을 한낱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어쨌든 신이 시켜서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면 당장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보편화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그들만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종교에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신의 명령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적인 이유의 채식주의는 더 이상 ‘종교적’ 채식주의가 아니라 ‘윤리적’ 채식주의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자 플라톤이 <에우티프론>에서 신 없이도 윤리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실증하는 사례가 되고 만다. 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채식을 해야 하는 보편적인 이유를 주장할 수 있다면 신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육식과 관련해서 종교는 현대인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점도 플라톤이 <에우티프론>에서 논파했던 점이다.) 가령 이슬람교나 유대교는 돼지고기 이외의 고기를 먹을 때도 자기 종교의 고유한 의식대로 도살한 것만 먹을 수 있다. 그 의식을 이슬람교에서는 ‘할랄’이라고 부르고 유대교에서는 ‘코셔’라고 부른다. 비행기 타기 전에 채식 식단을 주문한 경험이 있는 채식인들은 선택 식단 중에 할랄이나 코셔도 있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에서는 군대는 물론이고 교도소에서도 할랄이나 코셔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군대는커녕 구내 식당에서도 채식 식단을 찾기 힘든 우리로서는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할랄이나 코셔는 모두 살아있는 동물을 단숨에 죽이라는 것이 그 의식의 핵심 내용이다. 과거의 도살 방식은 모두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었으므로, 단숨에 죽이라는 것은 인도적인 면이 있었지만 기절시킨 후 도살하는 현대에 그런 방식은 잔인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할랄이나 코셔는 동물 보호 단체의 단골 항의 소재가 되고 있다.

불쌍해서 안 먹는다?

불쌍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동기도 보편화가 안 된다는 점에서 다른 동기의 채식과 마찬가지이다. 아니,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만큼 윤리적인 이유가 어디 있는가? 불쌍하다는 동기가 보편화가 안 된다면 윤리적인 동기는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 권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잔인한 모습을 보고 불쌍하다는 감정을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잔인하게 학대 받거나 죽어가는 동물을 보고 모두가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면, ‘개지옥’이라고 부르는 끔찍한 사건이나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돼지들을 구덩이에 파묻는 짓을 저지르겠는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도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고? 글쎄…, 정말로 그렇다면 정신이 온전하겠는가?)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 내 감정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학대 받는 동물에게 그리 연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랑할 만한 마음씨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마 나 같은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동물을 보면 불쌍하지 않느냐고 말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 불쌍하지 않은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고통 받는 동물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보다 적어도 동물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덜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육식이 비윤리적인 이유, 있다

지금까지 채식을 하는 여러 가지 동기 중에서 식감, 건강, 불쌍한 감정 그리고 트라우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편화하려는 의도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임을 보았다. 또 종교적인 동기는 보편화를 시도하겠지만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보았다. 짐작하겠지만, 나는 이에 비해서 윤리적인 동기는 당연히 그런 보편화를 시도하고, 적어도 현재까지는 보편화에 성공적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주장의 일반화 또는 보편화를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채식이 다른 동기에 의한 채식과 다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채식을 널리 알리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에게도 채식을 권한다고 할 때, 고기를 씹는 식감이 좋지 않으니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겠는가? 나는 고기를 안 먹은 지 6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고기를 씹는 그 느낌과 그때 나오는 육즙을 잊지 못한다. 고기를 안 먹으면 건강해지니까 먹지 말라고 하겠는가? 고기를 먹어야 영양가가 골고루 섭취된다고 생각하고 고기를 안 먹으면 힘을 못 쓰겠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고기가 건강에 안 좋으면 좀 적게 먹으면 된다고 말할 것이다. 신이 명령했으니까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이다.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하니까 먹지 말라고 한다면? “뭐가 불쌍하냐?”라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그른 행동에 대해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을 한다. 그런데 방금 말한 여러 가지 동기들은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식감이 다르다고 해서, 건강을 챙기지 않는다고 해서,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날 때부터 무디게 태어난 사람에게 비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못하다. 채식의 동기로서 윤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비윤리적인 행동이 된다는 뜻이다. 거짓말을 하거나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때리는 행동 같은 비윤리적인 행동은 각자의 선택을 중시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종류의 행동이다. 그런 비난을 함으로써 그런 행동을 삼가게 한다.

채식에 윤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윤리적인 동기로 채식을 한다는 것은 채식을 하지 않았을 때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뜻이고,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고기를 먹는 행동을 삼가게 한다.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용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짓말을 하거나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때리는 행동은 옳지 않다는 데에 동의한다.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여 고기를 먹는 행동은 옳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것이 윤리적 채식주의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것은 비윤리적일까? 다음 호에서 그 이유들을 살펴보자.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실생활에 유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대중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를 꾸준하게 쓰고 있다. <논리는 나의 힘>, <생각을 발견하는 토론학교> 등이 있으며, 새 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에서는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전제와 스스로 동물 냉혈한이라 ‘자백’ 하면서도 윤리적 채식주의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