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느끼는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게 윤리다
- 2014-12-17 17:38:50
- 월간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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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이 윤리적인 이유 ➋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게 윤리다
본격적으로 도대체 어떤 윤리적인 이유가 있길래 채식을 해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윤리적인 채식주의는 ‘윤리’라는 말이 붙어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윤리학의 연구 주제이다. 채식을 옹호하는 여러 윤리학 이론들이 있고, 그 이론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붙기도 한다. 그러나 특정 윤리학 이론에 바탕을 둔 윤리적 채식주의를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토대를 두고 채식을 옹호하는 주장도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리라 생각하는 주장에 근거해서 채식을 해야 하는 윤리적 이유를 펼쳐 보려고 한다. 채식을 하기 위한 전제가 되는 우리의 상식적 믿음은 무엇일까?
+ 글.최훈(강원대 교수) +에디터.이향재
첫 번째, 고기를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우리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할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육상 선수에게 ‘100미터를 10초 내에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선수가 지금 당장에는 뛰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력하면 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치타처럼 100미터를 3초에 뛸 수는 없기에 육상 선수에게 ‘100미터를 3초에 뛰어야 한다’는 의무를 주지는 않는다.
윤리적 의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윤리적 의무로 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전철역의 선로에 어떤 사람이 떨어져 있는데 전철이 다가오고 있다. 이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자신의 목숨이 희생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라’는 것은 보통 윤리적 의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가 죽은 이수현 씨는 의사자로 추앙받는다. 그런 행동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영웅 또는 성인(聖人)의 윤리이므로 보통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무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남을 일부러 때리거나 괴롭히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은 윤리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라’와 같은 의무는 무슨 행동인가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실천하기에 어렵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와 같은 의무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는 소극적인 의무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도 실천하기 쉽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니까.
윤리적 채식주의를 의무로 표현하자면 ‘고기를 먹지 말라’가 되겠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무슨 행동인가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므로 소극적인 의무이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쳐야 하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는 의무는 크게 보아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에 포함되는 의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고기를 먹지 않아도 정말로 살 수 있을까?
채식에 관한 영양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비건>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고기를 전혀 먹지 않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인도 사람들이 수학이나 과학 쪽의 전문 인력이 세계 곳곳에서 일하고 있다. 스님들도 고기를 먹지 않지만 체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지난 호에서 말했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다는 조사 통계도 있다. 이 정도면 고기를 먹지 않고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성급하지 않은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윤리란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윤리적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에 대한 의견은 윤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된다. 가령 행동의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처럼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주장하지만, 규칙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와 내가 속한 특정 집단에 유리하면 옳고 불리하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윤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지난 호에서 윤리라는 것은 일반화가 가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내가 윤리적이라고 생각한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도 지키라고 권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내가 유불리를 따져서 판단할 테니 당신도 당신의 유불리를 따져서 판단하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일반화된 도덕 판단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져서는 안 된다. 유리하다면 누구에게 유리하건 그것을 인정해야 하고, 불리하다면 누구에게 불리하건 그것을 삼가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서 ‘무슨 도덕 선생님 같은 말씀을 하고 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조금 고리타분하더라도 윤리와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윤리가 아니라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윤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윤리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것이라는 말에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누구나 다 자기 것을 챙기려 하는 것 아니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어떠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사실은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과 상관없이 마땅히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인생이 윤리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윤리적인 삶이라는 것은 그런 삶이라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실천을 못 할 뿐이다.
세 번째,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은 옳지 않다
두 번째 믿음은 세 번째 믿음과 바로 연결된다.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이 옳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런 차별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 생기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백인과 흑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나와 같은 남자 또는 백인이라는 이유로 상대편 성별이나 인종을 차별하는 것이 바로 성 차별 또는 인종 차별이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차별이 노골적으로 있었고, 지금도 그런 차별 행위가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지만, 지금은 그래도 노골적으로 그런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막상 성 차별 또는 인종 차별이 왜 옳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똑같은 사람이니까 차별하면 안 된다고 이유를 제시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는 사실 차별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다. 똑같은 사람이면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똑같은 성별이고 똑같은 인종이면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정신에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왜 평등한 대우의 경계선을 그어야 하는가? 그러면 그 경계선을 성별과 인종에 그으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더 나아가 동문과 지역에 그으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므로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유불리를 따지는 태도인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능력이 똑같으므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이 옳지 않은 이유로 많이 제시된다. 이것은 그 ‘능력’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만약 능력을 IQ와 같은 지적인 능력으로 본다면, IQ가 낮으면 차별해도 된다는 주장을 허용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나 능력을 ‘고통을 느끼는 능력’으로 보면 옳은 근거가 된다. 왜 그런지 실제로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이 이루어졌던 과거 행태를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
표적인 흑백 차별의 사례는 1960년대 미국, 버스에서 백인이 독점적으로 앉는 자리가 따로 있었고, 흑인이 앉는 자리도 백인이 요구하면 일어나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머리가 나쁘면 버스에 앉을 수 없는가? 백인과 흑인이 지적인 능력이 똑같으므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만약 IQ가 낮다면 버스에 앉지도 못하게 하는 차별을 옹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종에 상관없이 버스에 앉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구나 서 있으면 피곤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인종, 성별과 상관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속한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유불리를 따지며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보다 흑백 차별이 더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흑인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생각을 백인들은 전혀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나와 인종이 다르므로 무시했을 것이다. 흑인 노예제가 있던 시절의 노예 수송선을 보자.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를 보면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를 강제 운송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배 밑바닥의 짐칸에 500여 명의 노예들은 통조림 속의 정어리처럼 포개져서 바다를 건너야 했다. 선창의 공기는 산소 부족으로 불이 꺼질 정도였고, 끔찍한 위생 상태와 음식, 물 부족은 항해 중 많은 노예들을 죽게 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몰랐을까? 고통을 느끼든 말들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 흑인 노예선의 묘사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정확히 현대의 공장식 사육에서 동물을 키우는 모습과 겹친다. 사람들이 그런 끔찍한 상태에 처하면 고통스러워 하는 것처럼 동물도 똑같이 고통스러워 한다. 사실이 그런데도 나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고통을 느껴도 무시한 것이 바로 인종 차별이고, 나와 종이 다르면 고통을 느껴도 무시하는 것이 바로 종 차별이다. 종차별의 대표적인 행태가 현대의 공장식 사육과 도살이다.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육과 도살을 거칠 수밖에 없으므로 윤리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윤리란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유불리를 따지는 대표적인 반윤리적인 행태가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인데, 그것이 옳지 않은 이유는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데도 성별 또는 인종이 다르다고 해서 유불리를 따져 차별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물을 잔인하게 사육해서 도살하여 그 부산물인 고기를 먹는 행동, 곧 육식도 똑같은 윤리적인 문제에 처한다. 나와 종이 다르다고 해서 그 종의 고통을 무시하는 행동은 윤리적이지 못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다. 그 ‘남’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해를 끼쳤을 때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면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 해를 끼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 윤리적 채식주의이다.
다음 호에서는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한 질문이나 반박에 대답해 보겠다.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실생활에 유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대중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를 꾸준하게 쓰고 있다. <논리는 나의 힘>, <생각을 발견하는 토론학교> 등이 있으며, 새 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에서는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전제를 내세우며 스스로 동물 냉혈한이라 ‘자백’ 하면서도 윤리적 채식주의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Critical Issues
표상 2015-05-25 18:19:38 0
정말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