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이 윤리적인 이유3 ‘식물도 고통을 느끼지 않나?’라는 질문은 지겹다



채식이 윤리적인 이유 3
‘식물도 고통을 느끼지 않나?’라는 질문은 지겹다

<채식의 배신>(리어 키스 지음, 부키)이라는 책이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채식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들어보고 이론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고 필요하면 수정할 수도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자들의 관심도 꽤 받는 것 같은데,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채식이 여전히 낯선 우리나라에서 채식보다 채식의 배신이 더 주목 받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채식이라고 할 만한 게 있어야 채식의 ‘배신’이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필자는 한 때 정말 채식주의자였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채식에 대해 잘 모르거나 이상한 주장을 채식주의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고 하면 흔히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고 했다. 졸저인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에서 ‘육식주의자를 위한 Q&A’라는 제목으로 그런 대답을 했으므로, 여기서는 <채식의 배신>에서 여전히 줄기차게 제기되는 반박들 위주로 답변을 하겠다. 의도하지 않게 그 책에 대한 짤막한 서평이 돼버렸다.


+글.최훈(강원대 교수) +에디터.이향재
 
지난 두 호에 걸쳐서 윤리적 채식주의가 어떤 주장을 하고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근거들을 살펴보았다. 윤리적 채식주의의 중요한 이론가인 철학자 피터 싱어가 “이제껏 나는 논파하기 힘든 비판을 접해 보지 못하였으며, 이 책이 기초하고 있는 단순한 윤리적 논거의 견고함을 의심하게 만든 논변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 이론은 강력하다.

또 다른 철학자인 콜린 맥긴은 ‘이긴 논쟁’이라고까지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평가를 받는 것은 윤리적 채식주의의 논증들이 워낙 탄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이 그리 많이 시도되지 않은 탓인 것도 같다.

윤리적 채식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육식주의자들(육식주의자라고 해서 육식만 하는 것은 아니므로 잡식주의자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지만 채식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육식주의라고 부르자)이 육식을 방해 받는 상황도 아니고 양심의 거리낌을 받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에 입증의 부담이 없어서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해 굳이 반박을 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이라는 것은 반박과 답변을 통해 강력한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것인데, 그런 논의가 활성화되지 않는 현실은 윤리적 채식주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Q. 채식은 건강을 해치나?

윤리적 의무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부과된다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않고서 살 수 없다면 채식주의는 윤리적인 의무가 될 수 없다. <채식의 배신>의 저자 키스는 비건이 된 이후 퇴행성 관절 질환, 저혈당증, 구토증, 우울증 등에 시달린 경험담을 말한다. 그리고 책의 3분의 1을 할애해 채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연구들을 소개한다.

채식이라고 해서 채소만 먹는 것은 아니다. 베지닥터인 황성수 박사께서 강조하듯이 곡물, 채소, 과일을 골고루 먹는 것이 채식이다. 곡물만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채소만 많이 먹으면 설사를 하며 과일만 많이 먹으면 당분 섭취가 많아진다. 자신의 몸에 맞게 적당히 먹어야 한다.

그런데 <채식의 배신>는 곡물, 특히 한해살이 곡물 식사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는 견과류도 먹고 채소도 먹고 버섯도 먹고 과일도 먹는다. 혹시 키스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편식’ 때문이 아닐까? 키스의 건강 악화의 원인이 무엇이든 자신의 사례를 드는 것은 채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

채식을 해서 건강에 좋아지는 사례도 얼마든지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 몇 개 드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채식이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는 그런 한두 사례가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적 연구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영양학자가 아니므로 채식이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키스가 채식이 건강에 나쁘다고 제시한 증거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연구가 채식은 건강에 좋고 육식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음은 알고 있다. 영양학적 연구를 직접 수행할 수는 없어도 키스가 인용한 연구의 신뢰성을 검증하여 그의 주장이 합당한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채식의 배신>의 번역본에는 원서에는 있는 주석과 참고문헌이 몽땅 빠져버려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런 번역은 처음 봤는데, 의도적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원서의 참고문헌은 신뢰성이 없다.

신뢰성 있는 문헌은 동료들의 심사를 받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참고문헌은 그것보다는 인터넷에서 수집한 정보들이 더 많다. 특히 글쓰기 수업 때 학생들에게 절대 인용하지 말라고 말하는 위키피디아도 여럿이고 우리나라의 지식인 답변 같은 것도 있다. 같은 문헌을 10번에서 30번씩 연속해서 인용하는 것도 공정한 글쓰기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채식과 건강의 관련에 대해서는 굳이 그런 연구를 검증할 능력이 없어도 좋다. 지구 상에서 채식을 하면서도 건강하고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일반화하여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도들과 불교의 스님들 그리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들이 성급하지 않은 그런 사례들이다. 물론 그들이 건강한 데는 채식뿐만 아니라 신앙 생활도 한 몫을 했을 것이지만, 채식이 건강에 좋지 않은데 신앙의 힘만으로 이겨냈겠는가?

Q. 동물들은 서로 잡아먹는데 사람은 왜 동물을 먹으면 안 되나?

키스는 채식주의자의 무지를 채식주의를 포기한 계기로 들고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는 채식을 한다고 우기고,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사자와 같은 맹수는 영양이나 얼룩말과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한단다. 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자연이 본질적으로 사악하다는 것을 모른단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채식주의자 또 동물 권리 옹호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윤리적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은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반성할 수 있고 위에서 말했듯이 고기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은 그런 윤리적 반성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식 동물들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든 안 잡아먹든 그것은 사람이 고기를 먹으면 되는지 안 되는지 논의할 때 전혀 상관이 없다.

윤리적 채식주의자는 이렇게 윤리적인 규범을 논의할 때 자연적인 사실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사실에 개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육식 동물의 본성에 어긋나게 채식을 강요하는 윤리적 채식주의자는 전혀 없다. 키스는 윤리적 채식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특이한 채식’주의’자들을 윤리적 채식주의자로 간주하고 비판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Q. 인간은 지금까지 동물을 먹어왔지 않나?

키스는 또 우리 인간이 고기를 먹어온 오랜 역사를 이야기한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가 인간은 육식을 했음을 보여주며 현재의 인간을 만든 것은 육식이라는 것이다. 일단 그가 인용한 영양학적 연구처럼 이 고고학적 증거라는 것 역시 신뢰성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맞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말했듯이 그런 역사적인 ‘사실’이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규범’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인간이 오랫동안 노예제를 운영해왔다고 해서 노예제가 정당화되지 않듯이, 인간의 조상이 육식을 했든 안 했든 우리는 그것과 상관없이 육식의 윤리성을 논의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오랫동안 고기를 먹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과 같은 육식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과거의 동물은 지금과 같은 공장식 사육으로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Q. 식물도 고통을 느끼지 않나?

키스는 ‘동물은 안 되고 식물은 된다?’라는 제목으로 상당히 길게 왜 동물은 먹어서는 안 되고 식물은 먹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식물도 감각이 있고 생명활동을 하며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채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친절하게 대답해야겠지만, 한때 채식주의자였던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좀 지겹다.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가?

스스로 움직이는 식물도 있고 화학 물질을 교환하기도 하고 방어에 필요한 물질을 분비하는 식물도 있지만 그것이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가 되는가? 모든 생명이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이 왜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가 되는가?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무를 꺾으면 ‘아프다’고 말하는 유아적인 사고이거나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Q. 농업은 파괴적이지 않은가?

키스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동물들을 죽게 만든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쟁기질을 하다 보면 미생물들을 죽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동물들은 식물들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함을 과학자들의 연구는 보여준다. 그리고 고통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고기를 먹기 위해 일부러 동물을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윤리적인 농부들은 눈에 보이는 동물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키스는 일년생 초본 중심의 농업이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채식 식단에 일년생 초본밖에 없는 것처럼 그것 이야기만 줄기차게 한다.) 그런데 그는 왜 옥수수와 밀이 대량으로 사육되는지 진정 몰라서 그런 주장을 할까? 그 많은 곡물들은 인간의 입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입에 들어갈 동물을 먹이기 위해 재배된다는 것은 상식인데 말이다.

물론 인간의 농업 행위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농지를 늘려가게 하고 숲을 파괴한다. 그리고 키스의 주장대로 쟁기질을 하는 것이 표토를 파괴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현상이 왜 육식을 옹호하는 이유가 되는가? 그것은 환경을 보호하는 지속 가능한 농업 정책을 세워야 할 이유는 될지 몰라도 육식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대가 가장 환경 친화적이고, 그는 실제로 그런 시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육식은 그런 사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육식을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꺼내든 사람은 번지수가 한참 잘못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도 한때 채식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물고기를 요리하는 것을 봤는데 물고기 뱃속에 또 다른 물고기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동물들도 서로 잡아먹는데 우리가 고기를 못 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이 이유에 대한 대답은 위에서 했다. 그런데 프랭클린은 물고기가 요리되는 맛있는 냄새가 났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피터 싱어는 이런 프랭클린을 솔직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고기 맛이 ‘당겨서’ 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채식을 ‘끊었지만’ 키스는 솔직하지 못하다. 육식을 해도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지만 어느 하나 그럴듯하지 않다.

그냥 고기가 먹고 싶어서 고기를 먹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20년만에 처음으로 통조림에 든 참치를 먹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글자 그대로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오, 주여! 이게 바로 살아 있는 느낌이구나”라고까지 외친다. 호들갑은.

*다음 호에서는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에서 '외계인과의 대화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실생활에 유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대중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를 꾸준하게 쓰고 있다. <논리는 나의 힘>, <생각을 발견하는 토론학교> 등이 있으며, 새 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에서는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전제를 내세우며 스스로 동물 냉혈한이라 ‘자백’ 하면서도 윤리적 채식주의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